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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대한 취향도 변하는 것 같다. 정확한 자료를 제시할 수 없지만, 소싯적 즐기는 소리와 청년, 장년, 노년이 되어서 즐기는 소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게 확실한거 같다.

자연의 소리

바람은 지나면서 소리를 낸다. 갈대밭을 지날때, 바다위를 지날 때, 나뭇잎 사이를 지날때. 또다른 소리는 서로 부닥치면서 내는 소리들이다. 빗소리, 낙옆이 떨어지는 소리, 눈위를 걸을 때 나는 소리,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거닐때 나는 소리.

이들 자연의 소리는 자연의 물건들이 서로 상호작용할때 만들어진다. 부닥치거나 혹은 스칠적에 힘이 충돌해서 전달되고, 전달되지 않은 여분의 힘이 주변의 공기를 움직여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것들을 우리는 자연의 소리라고 한다.

자연의 소리는 듣기에 편하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빗소리는 주변을 오히려 조용하게 만들어주고, 고양된 정신을 부드럽게 가라앉혀준다.

기계음

인공물이 내는 소리들이다. 인공물들이 내는 소리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더 많은 인공에너지가 투입될 수록, 마음과 귀를 더 많이 피곤하게 한다는 점이다.

악기들도 인공물이다. 악기에서 소리를 내게 하는 힘은 마력으로 하자면 수십분의 일 마력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자동차는 수십에서 수백마력까지 한다. 비행기는 천마력에 가까운 에너지를 사용한다. 고작해야 들숨과 날숨 혹은 손목의 움직임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에서 만들어내는 소리는 자연의 그 소리와 매우 비슷하게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자동차의 소리를 우리는 소음이라고 하며, 그것은 우리를 짜증나게 만든다. - 때때로 즐기기도 하지만 이것은 예외 -. 비행기 소음은 짜증나는 정도를 지나쳐서, 사람의 몸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악기들도 보면, 더 작은 에너지가 사용되는 것일 수록, 더 예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같다. 가야금, 버들잎 피리, 소금등등이 그런것 같다.

디지털음

얘는 좀 특이한것 같다. 진동판을 움직여서 소리를 만들어낸다고 봤을적에는 본질적으로 자연의 소리와 기계음과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긴한데, 글쎄 다른 얘들과 같다고 보기엔 뭔가 좀 꺼림직 하다.

내가 생각 했을적에, 다른 얘들과의 차이라면,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보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인것 같다. 빗소리는 떨어지는 비에 그런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보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음은 본질적으로 악기음과 비슷한 면이 있을 것이다. 드럼은 드럼세트 그 자체에 음악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지는 않다.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에 의해서 소리가 만들어진다. 프로그래머나 혹은 음악가가 음악데이터를 만들면, 프로그램이 이를 해석해서 진동판을 움직여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로그램이 연주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 물론 디지털음은 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소리의 취향

어린시절 비만내리면, 빗소리를 들으면서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그렇게 시간을 녹였다. 그때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면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정말 행복을 느꼈던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때 일이 생각나는걸 보면 말이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면서 강렬한 비트의 음악들을 찾게 되었다. 록, 헤비메탈, 힙합 기타 출처가 분명하지 않는 여러 음악들. 거기에서 더 나이를 먹으니, 이제는 듣기 쉬운 음악을 찾게 되는 것같다. 이러한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닌것 같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이를 먹을 수록 더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최후에는 극히 자연음에 가까운 창이나 단소, 가야금 이런 소리에 이르는 것 같다.

뜬금없이, 그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어릴적 자연의 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자연과 평형을 이룬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청년이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 빨리, 더 높은 곳에 도달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얻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젊었을 때 우리는 정신과 육체를 긴장시키고 고양시켜서 상시로 여기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채찍질을 해야 한다. 강렬한 음악을 찾는 이유는 강렬한 음악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가 원하는 바에 맞게 긴장시키고 고양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상태는 꽤나 피곤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그리고 욕망이 그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지쳐가기 시작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고양된 상태로 두기에는 너무 부담이 된다. 여기에는 젊었을 때 처럼, 세상에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다른 부드러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만족하는 법을 깨우쳤다거나.

또한, 우리의 몸과 정신은 우리가 결국 언젠가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동식물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상태는 결국 자연과 평형을 이룬 상태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상태라는 것은 주변환경으로 부터 에너지를 섭취해서 주변 환경보다 더 높은 에너지를 유지하는데 있을 것일테니 말이다.

이제, 젊음이 다하고 자연과 평형을 이루어야할 그 때가 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것을 알아채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생각과 행동이 잔잔해지고, 눈은 멀리 쳐다보고,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찾는 것으로 소리에 대한 취향도 변하는게 아닐까.

동물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죽음에 대한 가치판단이 없는 것 같다. 늙어서 죽을때가 된 동물이 죽기 싫어서 아둥바둥대는 것은 보지 못한것 같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등을 보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세상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두려움을 낳는다고 했던가.

동물과는 달리 세상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진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자연과 평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