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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소스 프로젝트에의 열망

많은 개발자들이 회사일과는 별도로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한 이름있는 프로젝트로까지 성장시키기를 원한다. 왜 일까 ? 돈을 벌 기회를 얻을 수 있다라거나 혹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다라는 등등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왠지 뒷통수가 근질근질 하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 ? 그렇다면 다른 산업분야에 비해서 왜 유독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 이렇게 말하면 오픈소스 공동체 혹은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있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소프트웨어쪽은 그러한 풀뿌리 공동체 공동체가 살아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왜 유독 놀만한 멍석이 잘 깔려져 있을까 라는 물음이다.

소프트웨어 산업에는 장인정신예술인의 중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해커문화라는게 남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물건을 만드는 장인처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기를 원한다. 혹은 자신의 이름이 아로새겨진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이 아로새겨진 소프트웨어가 전시 되기를 원한다. 다른 어떠한 산업분야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아마 예술분야에서나 겨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멍석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리차드 스톨만이다. 시대의 반항아. 똘아이?. 소프트웨어 계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근본주의자, 원리주의자, 순종주의자, 천재 프로그래머, 마지막 해커, 고집쟁이, 피리부는 아저씨, 사이비 교주 요러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소프트웨어 바닥에 예술계에나 있을 법한 이러한 잘다듬어진 공동체, 해커 마인드를 만들게 되었는지, 소프트웨어 개발은 예술의 그것과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했는지 즉 일종의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문화의 기반을 닦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이하며 때문에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우선 순수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봐야 겠다. 비록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처럼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소프트웨어처럼 자본과 시장에 대항해서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운동들이 있어왔으며, 소프트웨어 보다는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예술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대접을 받게 된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이전의 예술가는 독립적인 예술가가 아닌 교회궁중의 후원을 받는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낸다라는 지금의 예술가의 이미지와는 전혀달랐다. 후원을 받는 궁중과 교회에 봉사하는 고용인으로써 그들의 의뢰를 받아서 작품을 만들 따름이었으니 예술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실제 당시의 많은 작품들에 작가가 명시되어있지 않았던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바흐, 베토벤 정도되는 유명인 정도가 되어야 그나마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며, 이들 당대의 유명인 조차도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예술가가 예술가로써의 독립적인 지위와 명성 자존심을 회복 한것은 개인의 주체의 중요성이 부각된 르네상스 이후에서 부터이며, 이때부터 일반 대중은 예술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고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같이 되고자 하였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만들고 싶어하는 것을 만들며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으며, 개인이 인간으로써 가져야할 자존감을 지켜나갈 수 있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물론 이때의 예술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질을 타고난 천재라는 이미지가 강하긴 했지만 말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지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자본이나 회사 사회의 굴레에서 자본이나 혹은 고객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자신이 자기를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를 원한다. 왜 예술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을까. 왜 자기 스스로가 자본가가 되길 원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상태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 기술자들이 장신 혹은 예술가 처럼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용적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장인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실패했다. 소프트웨어 분야를 제외하고는... 다른 거의 모든 분야가 산업화되고 자본에 완전 종속되어 버렸다. 소프트웨어분야 처럼 해커문화, 장인문화, 풀뿌리 공동체 문화가 명백하게 남아 있는 분야는 없다.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산업에 종속시키지 않도록 만든데에는 역시 리차드 스톨만과 자유소프트웨어재단 그들의 이상에 따라주었던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개발자들의 힘이 무엇보다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자본과 타협하면서 적당히 우리의 자존심을 유지시켜줄 공동체를 지켜나가자라고 안이하게 타협했던 다른 산업의 노동자와는 다른, 어찌 보면 정줄을 반쯤 놓은 사이비교주처럼 모든 상업, 독점, 자본, 시장, 상품에 일말의 타협도 없이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킬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산업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소프트웨어영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데에는 자유스러우며 반사회적이며 공동체지향적인 해커문화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자본과 오픈 소스와의 관계

자본은 공포를 무기로 사람을 길들인다. 자본에게 (주로 실업의 형태로)버림받으면,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심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실업을 시간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쓸모 없어진 상태로 생각한다. 실업을 그리도 끔찍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다.

실업을 끔찍 스럽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공포로 사람들을 휘어 잡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원래 사람은 배부르면 배짱을 튕기게 마련인데, 이래서는 자본이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서라도 자본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야 하는게 자본의 임무다.

생산수단을 제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경쟁을 심화 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비형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경쟁의 심화는 다시 말해서 이렇다. 여기 하나의 의자가 있다. 경쟁자는 열명이다. 9명을 이기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스트로이드제를 복용해야 하며, 전문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아야 한다. 이런거다.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공식적인 룰은 대게가 성과영어 성적이다. 비 공식적인 룰, 즉 얼마나 사내 정치를 잘 하느냐 하는건 정량화하기 힘드니 제외한다.

문제는 그래도 의자는 하나라는 거다. 스트로이드제를 먹으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서 아놀드 근육을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8명의 다른 아놀드와 경쟁을 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의자를 차지한다고 해서 그렇게 끝나는게 아니란 거다. 의자를 얼음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좀 앉아 있으면 녹아 버린다. 새로운 더 좋은 의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제 20명의 아놀드와 싸워야 한다는 게다.

눈 코 뜰세없이 바쁜 경쟁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배우는 건 기실 자신을 위해서 배우는게 아니다.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비용은 게임의 룰을 만든 사람에게 이득이지 참여하는 사람에게 이득이 아니다. 결국 월화수목금금금 뼈빠지게 일했는데, 나중에 보니 회사에서 시키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종속 관계, 다른말로 주인, 노예관계.

사람이 돈을 축적하고 있으면, 나름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생산수단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시간까지 충분한 사람이라면,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된다. 자본으로써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중에 돈이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빚까지 내면서 미래의 자원을 앞당겨 소비하도록 하며, 이 것이 현대사회를 앞서가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라고 선전한다.

소비적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본이 만들어 낸게 소위 말하는 트랜드다. 트랜드는 심리적 내구도의 개념으로, 물건이 충분히 쓸만한데도 불구하고 즉 물리적 내구도에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폐기처분하고 (쓸데 없는 기능을 몇 개 추가한)신상을 소비하도록 만든다.

오픈 소스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스스로 생각을 하게 하고 스스로 생산을 하게 한다. 자본이 오픈소스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공산주의,진보를 가로막는,회사의 이익을 좀 먹는이라는 격한 반응을 하지 않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기분이 우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놈의 리눅스, 아파치, Mysql 조합이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성장을 해버린거다. 어쩔 수 없이 오픈소스진영과 공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들 거대 자본이 오픈소스진영이 계속 주도권을 가져가도록 방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제시한 환경, 그들이 제시한 개발 및 배포 플랫폼을 사용하도록 유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전략을 써왔다. 이미 검증된 전략이기 때문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공장화가 완료되어서 상품이 창고에 남오도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대량 소비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상품의 대량 축적과 소비 및 과시 욕망은 20세기 초에나 들어서 생긴거다. 20세기 초만해도 사람들은 필요한 많은 것들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으며, 필요하지 않은 것은 구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본은 광고를 동원해서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은 공장에서 엄정한 평가를 거쳐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 낙후된 생활양식이라고 선전을 하고,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거기에 길들여지게 된다. 거기에 트랜드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지면서, 소비를 지향하는 사람이 바람직한 생활 형태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다.

오픈 소스에 대한 자본의 대처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오픈 소스 제품은 상용 제품에 비해서 품질이 떨어집니다. 그런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한다면, 경쟁에서 뒤쳐지고 말겁니다. 오픈 소스를 사용해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져 주나요 ?. 오픈 소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고객에게 들키면, 당신들은 능력이 없는 회사로 비춰지게 될 겁니다. 우리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세요!!!

자본의 이러한 선전이 먹혀든 다른 모든 산업분야와는 다르게 (아마도)유일하게 소프트웨어 쪽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승리가 계속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자신들의 플랫폼에 개발자들이 종속되기를 원하면서 플랫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약간의 자유를 더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자본의 목적은 자신들의 이익의 극대화다.

자유소프트웨어 재단과 오픈소스 진영의 껄끄러운 관계

많은 사람들이 자유소프트웨어운동과 오픈소스운동이 같은 것이라고 혼동한다. 때때로 오픈소스진영의 대부가 리처드 스톨만인 것으로 소개하는 문서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단체이며, 게다가 그닥 좋은 관계도 아니다.

2006년 리처드 스톨만이 한국을 방문해서 강연을 하는 와중에 자유소프트웨어가 아닌 오픈소스에 대한 질문을 하자 바로 차단신공을 발휘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일체의 어떠한 타협을 거부하는 자유소프트웨어 재단과 완고함은 비교적 자본과 시장과 유연한 관계를 보여주는 오픈소스진영은 꽤나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 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스톨만의 눈에 자본과 시장과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픈소스진영은 적과 손잡은 위험한 불순분자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이 지나치게 완고하든지 간에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픈소스진영이 자본과 사회적 공동체 가운데에서 균형을 지킬 수 있도록 긴장감을 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자본과 시장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려면 이러한 사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업화와 자본화의 거대한 물결속에서도 예술계와 소프트웨어계가 나름 이러한 공동체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건 역량있는 이단아들이 활약해주었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