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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처세술.. 이라기 보다는 요렇게 한번 살아보자라는 지침서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 허리띠를 졸라매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 내일이 오늘이 되면 그 오늘의 내일을 위해서 허리를 졸라매게 되어있다. 호황기때는 이때 벌어둬야 한다고 해서 철야로 구른다. 그러다가 경제침체기가 오면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쫓겨난다. 어찌 어찌해서 살아남아서 호황기가 오면 다시 허리띠 매고 달려야 한다. 언제까지 달려야 하나? 죽을 때 까지?

오늘 행복할 수 없으면 내일 도 행복할 수 없다. 오늘의 행복을 미루면 내일의 행복도 미루어진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고 오늘 구르지 말자.

오늘해야할 일 대신 하고싶은일을 한다

오늘 해야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오늘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안해도 되는 일들이다. 그대신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오늘 못한 일은 내일한다라는 마인드가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건전지가 아니다

업무가 끝난 후의 시간 혹은 일이 없는 주말과 휴가는 재충전 - 리플레쉬 -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건전지도 아니고 왠 재충전. 업무가 끝난 이후의 시간은 자유시간이지 다음에 있을 회사업무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서 담보된 시간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몇개는 만들자

돈을 벌 수 있는 취미를 얘기한다. 왜 돈을 벌 수 있는 취미냐 하면은 그냥 재미로 하는 취미는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전문가는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쫓겨나거나 낙오하게 되면 정말 말 그대로 자신의 생존조차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이런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비굴하게 사는게 처세술이 되어 버렸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 그렇지 않다. 자본은 나와 상관없이 움직인다. 자본의 실수로 예컨데 지금과 같은 공황에 준하는 상황이 되거나 잘못된 정책등으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시장상황이 나빠지거나 하면, 자신의 상황과 의지와 상관없이 쓸모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상위 5%에 들면 된다고 하지만 치열한 경쟁속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생활 삶을 희생하지 않고 상위 5%에 드는게 말처럼 쉬운일인가. 대게는 자신의 자존심과 삶을 희생해야 한다. 아주 능력있는 소수만이 자신의 자존심과 삶을 지키면서 그 상위 5%안에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단순히 즐기기만 하는 취미말고 최소한의 생존정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취미를 가지기로 했다. 생산수단을 손에 쥐겠다는 얘기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을 때, 자존감 역시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도와주고 나면 걍 잊어버리자

내가 예전에 이러이러한 것도 도와줬는데 이정도 것도 안해줘 ? 서운한데 ?이런 생각은 애시당초 가지지 않는다. 그냥 도와주고, 도와주고 나면 잊어버린다. 아 근데 이게 나를 대상으로도 그대로 적용이 되니 좀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긴하다. 남이 나를 도와준 것도 마음에 담아두질 않게 되어서..

국가는 국가이고 회사는 회사고 나는 나다

WBC와 월드컵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승리하고 나서 마운드에 태극기를 꼽는모습. 이런게 불편하다. 약간 오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김연아의 공연중계도 보지않는다. 때때로 예전 황우석씨의 미국에 태극기를 꼽는 기분이였다. 국가 없는 과학자는 없다 요런 애국주의적 행위들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애국이 국가라는 매크로단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게 마이크로화단위가 된게 애사심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위해서 프로젝트를 위해서 팀을 위해서 나를 희생해야 하리.. 라는 생각을 싫어한다.

껍질

나는 껍질을 가지고 있다. 나와 생각이 공유될것 같지 않으면 대화를 하지 않는다. 말이 안통하기도 하고, 굳이 말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생각이나 분위기를 공유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관계자체를 나쁘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러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실수 몇번했다고 실수가 반복된다고 해서 그거 가지고 싹수가 노랗다느니, 쟤는 원래 저렇다느니, 생각이 없이 사는 것 같다느니 이런 말 하지 않으며 이런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어렸을적 기억이다. 개구리가 역기를 들고, 앵무새가 산수를 하고, 곰이 별별 재주를 다 부리는 내용을 보여주는 TV 프로가 있었다. 이때 나는 어머니로 부터 말 못하는 짐승도 훈련시키면 저렇게 하는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동물보다 못하다라는 얘기를 듣곤 했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일인 것 같은데, 여전히 머리속에 각인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동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였을까 ? 내 생각에, 그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에 머릿속에 각인이 된것 같다.

동물이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는 건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먹을 것을 주기만 하거나 고통을 덜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되기 때문에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할 뿐이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시키면 시키는데로 실수 없이 척척 해내는 사람을 원한다면 기계를 도입해야지. - 현대사회가 그런 사람을 대량으로 원하기는 하지만 서도.. -

때문에 나는 사람이 실수를 해도 혹시나 실수를 되풀이 한다고 해도 거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실수하셨네요를 얘기해주는 정도에서 끝난다. 에 물론 이것도 다른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나에게도 적용이 된다. 즉 내가 실수를 했다거나 실수를 되풀이 했다고 해서 자존심을 건드는 수준에서 얘기하는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게 어머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닥 살아가기 좋지 않은 처세술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