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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의 출현

쓰여진 글에 대한 저작권이 언제 출현했을까? 왠지 궁금해 졌다. 당연히 쓰여진 글에 대한 저작권이니까. 글이 종이든지 어디에든지간에 씌여진 시점부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저작권 개념은 쓰기가 발명되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지나서 만들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기가 내면화 되는 시점 - 대게는 인쇄가 일반화된 시점부터 본격적인 내면화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 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쓰기가 내면화 되었는지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알아봐야 겠는데, 그럴려면 최초 등장한 쓰기와 쓰기가 내면화된 시점의 쓰기의 차이점에 대해서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쓰기가 내면화되지 않은 시절에 은 기억을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전부터 내려온 틀에박힌 정형구과 운율등을 이용했다.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호머의 서사시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킬레스가 분전을 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빠른발의 아킬레스는 영웅의 방패와 창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게 훨씬 기억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를 지모가 뛰어난 오디세우스라고 한다든지, 신과 같은 아가멤논이여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러한 정형구적인 표현은 중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잠자는 동안의 달콤한 꿈을 믿을 수 있다면 내 꿈은 필시 좋은 소식이 온다는 증거일 것이다. - 로미오와 줄리엣 중-.

정형구적인 표현은 사람의 감성을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에 적절히 사용한다면 매우 숭고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호머의 서사시가 그동안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아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팔각운이네, (우리나라 시조의)3-3-4 운율이네 하는 것도 같은 예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이러한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말이다. 환타지 소설에서나 간혹 볼 수 있을 뿐이고, 가능하면 정형구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도를 받는다.

이렇게 이들 정형구와 운율은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에 의해서 전승된 공중의 지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들로 이루어진 결과물 역시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니 저작권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예로든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경우에도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 구술로 전승되는 대부분의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구전되던 여러 신화를 집대성 한 사람이 호메로스 일 것이다라는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는 집대성한 사람이 호메로스인가 하는 것도 명확하지가 않다. 이런 구술문화에서 저작권은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쓰기가 출현한뒤에도 오랫동안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모호했는데, 왜냐하면 초기 쓰기는 지금의 쓰기와는 달리 사람이 로 한것을 옮겨적는 작업이였기 때문이다. 공동의 재산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종이에 고정시키는 작업이였다. 이당시 말로 된 작품이란 것은 과거의 지혜를 기억하기 좋게 운율이 가미되어서 전승된 정형구의 집합이였으니, 이들 과거의 지혜와 정형구들 운율들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경우 중요한 것은 저작권이 아니라 그 지혜를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자 즉 시인 혹은 나이를 먹은 지혜로운 노인들이였다.

노인이 천대받는다고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슬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지혜는 구전되는 말로써 전달되는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독립된 문자에 의해서 전달되고 공유되어진다. 현대사회에서 노인의 지혜는 거의 쓸모가 없어졌다. 물론 노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혜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겠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삶의 지혜는 쓸모가 없어진다. 대게는 할일 없는 노인의 쓸데없는 잔소리 취급받는다. 그러니 노인이 버려질 수 밖에.. 이건 덤으로 드는 생각인데, 노인이 되어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생산수단을 가지는 수 밖에 없다. 농사든지 뭐든지간에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왠만큼의 돈과 지식과 정보를 가지지 않는 한은 폐기처분 될 걸 각오해야 할 것이다. 있 본론으로 되돌아와서 인쇄술이 발달해서 본격적인 쓰기가 정착되면서, 동시에 프라이버시 의식 역시 성숙하게 된다. 기존의 말하기가 집단과의 교류하는 행위라면 쓰기와 읽기는 개인의 내면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혼자 짱박혀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개인만의 공간이라는 것이 이때부터 생겨나고 여기에서 프라이버시가 생겨났다. 그전에도 몇몇 작가들이 그러한 개인적인 행위를 해오긴 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또한 글을 이용한 창작 행위가 가능해졌다. 글로 적혀지면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정형구적 표현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씌여진 문서나 책은 공중과 집단의 것이 아닌, 개인이 창작해서 만들어낸 소유할 수 있는 사유 가능한 물건의 성격을 띄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물건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자신이 만들어낸 글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저작권의 개념이 만들어 진다.

저작권의 발명인 것이다.

이후에 글과 문서에 대한 저작권의 개념이 확고해지고 최근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이것은 인터넷시대에까지 계속 유지된다.

왜 아시아는 저작권이 잘 지켜지지 않는가 ?

인터넷 컨텐츠에 대한 저작권이 특히 아시아지역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교육을 못받아서, 미개해서, 심지어 양심이 버려서"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문화적차이 때문이지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미개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서양은 이른 시간에 쓰기를 내면화 시켰고 이에 기반해서 개인주의를 발전시켰다. 반면 동양은 여전히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좀더 집단친화적이고 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문화 즉 구술적문화에서는 컨텐츠를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과거 쓰기가 내면화 되기 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여전히 컨텐츠가 개인의 물건이 될 수 있고 판매할 수 있다라는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동양인들의 인식이 저급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진보라는 것을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얼마나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가로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동양의 그러한 공동체적 마인드 자체를 저급하게 생각하게 된거다. 그러나 동양적인 마인드와 서양적인 마인드는 서로 다른것이지 등급을 메길 수 있는 그런건 아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생활방식의 등장,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론 혹은 회의론들, 동양철학에 대한 재평가, 뿔뿌리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오픈소스운동과 자유소프트웨어 운동 등에서 나타나듯이 말이다.

자유소프트웨어와 저작권

https://lh4.googleusercontent.com/-yXOcjZqoyoI/SzIp56aex_I/AAAAAAAAA5g/ynwZ_gue160/s288/gnu.png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와와 오픈소스 공동체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기반한 생각과 지혜의 물건화와 사유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생각, 아이디어는 함께 공유해야할 공동의 자산이라고 본다. 고대의 서사시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자유소프트웨어(:12)와 오픈소스(:12)는 서양보다는 동양에 어울리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이 오히려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고 서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먼저 뿌리를 내렸고, 공동체정신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한 반성으로 먼저 서양사회에서 생겨난게 아닐까 ?

이러한 반저작권 혹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 소프트웨어영역에 쉽게 뿌리내린 이유는 인터넷(:12)이란 매체의 특징이 한 몫 한것으로 생각된다. internet(:12)은 애초에 관리주체나 중심이 없는 상태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자원과 노동력을 집중시키는 자본주의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데 인터넷은 독점적인 권한을 가지는 개인 혹은 집단이 관리하는 사유재산이 아닌 인류공동의 재산이라는 인식이 초기에 생성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이 있게한 해커문화가 생겨나게 되었고, 인터넷의 자본화에 맞서서 강력한 풀뿌리 공동체를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어떤 산업분야에서도 볼 수 없는 (독점적인 저작권에 기반하지 않은)자유로운 정보공유, 서로 연대하며 서로를 존중해주는 공동체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CC와 저작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기존 저작권의 한계가 명확해 진다. 정보화 시대 이전에는 정보 생산은 방송사와 신문사 같은 대중매체가 담당을 했다. 정보 생산과 소비가 엄격하게 구분됐고, 정보의 일체의 권한은 대중매체를 소유한 회사에 있었다.

인터넷이 대중화 되면서 일반 시민도 정보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소비와 생산의 엄격한 구분이 사라지게 됐다.

인터넷 상에는 누가 생산했는지 모를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저작자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글들에 대한 권리도 애매모호 하다. 블로그에 올린 글은 저작자가 블로그 주인장의 것임이 분명하겠지만, 이 글의 허가권에 대한 것은 명확하지가 않다. 저작자를 밝히고 펌해도 되는가 ? 링크만 걸어야 하는가 ? 아예 내글 처럼 올릴 경우 어떤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가 ?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가 ?

CC는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비영리 기관으로, 저작물의 부분적 공유와 제한을 그 목적으로 한다. CC에서 제안하고 있는 라이센스가 CCL이다. GNU(:12)의 GFDL(자유문서 사용허가서)나 GPL과 비슷하게 볼 수 있지만 정보의 완전한 자유와 공개를 지향하는 이들 라이센스와 달리, 제한을 설정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맞추어 자신의 컨텐츠에 대한 소유권한을 명확히 하기 위한 목적이 좀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 컨텐츠를 위한 저작권인 만큼, 기존 대중 매체 소유자들의 저작권 보다는 공유에 어느 정도 촛점이 맞추어져 있긴 하다. GNU(:12)와 기존 저작권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나 할까 ?

CCL의 이러한 제약 조건들 때문에, 자유로운 정보 공유를 지향하는 GNU와 오픈소스 측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CCL에서는 다음의 권리를 선택할 수 있다.
  • 저작자 표시 : 원저작자를 표시해야 한다.
  • 비영일 : 저작물을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 변경 금지 : 저작물을 변경할 수 없다.
  • 동일조건 변경 허락 : 1차 저작물에서 파생된 2차 저작물은 원저작물과 같은 라이센스를 사용해야 한다. 이 조건은 GPL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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